기름값이 마이너스가 된 날, 브렌트유만 멀쩡했던 이유

작성일: 2026-08-05T03:58:08.314530+00:00


2020년 4월 20일 오후, 뉴욕 시장에서 원유 1배럴 값이 -40.32달러를 찍었습니다.
오타가 아닙니다. 기름을 가져가는 사람한테 배럴당 40달러를 얹어주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같은 시각 런던에서 거래되던 브렌트유는 크게 하락하긴 했어도 마이너스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똑같은 원유인데 한쪽만 바닥을 뚫은 겁니다. 이 하루가 브렌트유와 WTI의 차이를 교과서보다 잘 설명합니다.

만기와 창고 부족이 만든 마이너스 유가

마이너스 유가 당시 CNBC 트위터

원유 선물은 몇 월에 원유 얼마어치를 사겠다는 계약서입니다. 대부분은 만기 전에 계약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빠져나옵니다. 실제로 기름통을 받으려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문제는 만기까지 못 빠져나왔을 때입니다. 그때는 진짜로 원유를 받아야 합니다. 어디서? 오클라호마주 쿠싱입니다.
2020년 봄, 코로나로 비행기가 멈추고 공장이 섰습니다. 기름이 남아돌았어요. 미국 에너지정보청 자료를 보면 쿠싱의 저장 능력 7,600만 배럴 가운데 4월 17일 기준 6,000만 배럴이 이미 차 있었습니다. 76%가 소진된 상태였죠.
여기서 만기가 닥쳤습니다. 계약을 들고 있던 사람은 며칠 뒤 원유를 인수해야 하는데 넣어둘 창고가 없었습니다. 계약을 넘기려 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고요. 결국 돈을 드릴 테니 제발 가져가시라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브렌트유가 마이너스를 피한 이유 : 바다 창고


같은 시기 브렌트유도 팔자는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이너스로는 가지 않았어요.
쿠싱은 내륙 한복판입니다. 바다까지 수백 킬로미터, 나가는 길은 송유관뿐이에요. 길이 막히면 기름은 갇힙니다.
브렌트는 애초에 바다에서 시작합니다. 북해 유전에서 퍼낸 원유는 유조선에 실려요. 그리고 유조선은 그 자체로 떠다니는 창고입니다. 살 사람이 없으면 배를 세워두면 됩니다. 유럽에서 안 팔리면 뱃머리를 아시아로 돌리면 되고요.
인도받을 장소가 어디냐. 이 하나가 가격의 바닥을 갈랐습니다.

세계 뉴스에 뛰는 브렌트유, 미국 뉴스에 뛰는 WTI

이 차이는 평소에도 작동합니다.
WTI는 미국 사정에 먼저 반응합니다. 셰일 생산량이 늘었는지, 쿠싱 재고가 쌓였는지, 송유관에 문제가 생겼는지. 전부 미국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브렌트유는 세계 사정에 반응합니다. 중동 정세가 불안해져 해상 운임과 보험료가 상승하면 이쪽에 위험 비용이 먼저 붙어요. 아시아 수요가 살아날 때도 마찬가지고요.
두 값의 차이를 스프레드라고 부르는데, 이 숫자는 품질 격차가 아니라 그때그때의 물류 사정을 압축한 값입니다. 스프레드가 벌어졌다는 기사를 보면 어느 쪽이 움직였는지부터 확인하세요. WTI가 하락해서 벌어진 것과 브렌트가 상승해서 벌어진 것은 원인도, 오래갈지 여부도 다릅니다.

23년부터 브렌트유와 WTI는 일부 같은 원유를 공유

실시간 브렌트유 시세

하지만 반전이 있어요.
브렌트유 가격은 유전 1곳의 기름값이 아닙니다. 여러 유종의 실제 거래가를 묶어 만든 기준가예요. 오랫동안 그 바구니에는 북해산 5개만 담겼습니다. 브렌트, 포티스, 오세베르그, 에코피스크, 트롤. 전부 영국과 노르웨이 앞바다에서 나옵니다.
2023년 5월 2일, 그 바구니에 미국산이 들어갔습니다. 텍사스에서 나오는 WTI 미들랜드입니다. 북해산이 아닌 원유가 브렌트 가격 체계에 들어간 첫 사례였어요.
이유는 좀 씁쓸합니다. 북해 유전이 늙었거든요. 기준가를 만들 실물 거래가 줄어들면 가격이 몇 건의 거래에 휘둘립니다. 그래서 대서양 건너 물량을 끌어와 바닥을 넓힌 겁니다.
그러니까 브렌트를 북해산이라고만 설명하면 이제 절반만 맞습니다. 앞에서 본 미국 VS 세계 라는 구도도 예전만큼 깔끔하지 않고요. 두 가격은 이제 일부 같은 원유를 공유합니다.

브렌트유 가격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여기까지 읽으면 왜 앱마다 값이 다른지 짐작이 갈 겁니다. 애초에 브렌트유 가격이라는 이름을 단 숫자가 여러 개예요.
실물 인도를 앞둔 원유의 대표 평가가격이 하나 있습니다. 대륙간거래소에서 월별로 거래되는 선물 가격은 또 따로고요. 선물도 몇 월물이냐에 따라 값이 다르고요. 투자 앱에 뜨는 건 대부분 선물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볼 때 3가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1. 선물인지 봅니다. 종목명에 계약월이 붙어 있으면 선물입니다.
  2. 몇 월물인지 봅니다. 만기가 가까울수록 당장의 수급을, 멀수록 시장의 기대를 반영합니다.
  3. 실시간인지 봅니다. 무료 화면은 10~15분 지연이 흔합니다.

차트가 계단처럼 튀는 구간을 봤다면 대개 만기 교체 지점입니다. 시장이 급변한 게 아니라 근월물과 다음 월물의 가격 차이가 그 자리에 얹힌 거예요. 원유 상장지수펀드를 오래 들고 있으면 이 교체가 반복되면서 수익률이 유가 등락률과 벌어집니다. 유가는 상승했는데 내 계좌만 그대로인 이유가 대개 여기 있습니다.

국제유가 하락해도 기름값 그대로인 이유


주유소 가격과 비교해보고 싶다면 배럴당 달러값에 원달러 환율을 곱한 뒤 158.987로 나누면 리터당 원가가 나옵니다.
여기에 세금과 정제비, 유통 마진이 붙어야 주유소 가격이 됩니다. 국제유가가 하락한 날 기름값이 그대로인 건 담합이라기보다 이 시차와 세금 구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 더. 한국이 실제로 들여오는 원유는 대부분 중동산입니다. 그 값은 브렌트가 아니라 두바이유를 기준으로 매겨지고요. 두바이유가 우리가 치르는 값이라면, 브렌트유는 그 값이 어디로 갈지 알려주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브렌트유가 WTI보다 항상 비쌀까요?

아닙니다. 두 값의 우열은 그때그때의 물류와 재고 사정에 따라 뒤집힙니다. 미국 내륙에 원유가 쌓이면 WTI가 눌리고 해상 운송이나 유럽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브렌트가 먼저 반응합니다.

원유 가격이 또 마이너스가 될 수 있나요?

2020년 4월은 저장 공간이 꽉 찬 상태에서 만기가 겹친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구조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에요. 실물 인도 조건이 붙은 선물이라면 창고가 막혔을 때 같은 압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시세는 어디서 확인하나요?

월물별 선물 가격과 계약 조건은 대륙간거래소, 현물 가격과 미국 원유 재고는 미국 에너지정보청, 세계 수요·공급 전망은 국제에너지기구 보고서에서 봅니다. 국내 주유소 가격은 오피넷, 실시간 시세와 등락률은 알파스퀘어 시장지표에서 볼 수 있습니다.